메르센 조약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메르센 조약은 870년, 843년 베르됭 조약을 대체하며 체결된 조약으로, 카롤링거 제국의 분할을 결정했다. 로타르 2세의 사망 후,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가 로타링기아 영토를 분할하기 위해 이 조약을 맺었다. 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로 재편되었으며,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리브몽 조약으로 대체되었으며, 오늘날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원형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림뷔르흐주 (네덜란드)의 역사 - 림뷔르흐 공국
림뷔르흐 공국은 1839년 런던 조약으로 네덜란드에서 분리되어 독일 연방에 편입된 국가였으나, 1866년 독일 연방 해체 후 1867년 런던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 왕국의 필수 지역으로 재편입되었다. - 림뷔르흐주 (네덜란드)의 역사 - 림뷔르흐 공국 (중세)
림뷔르흐 공국은 11세기 초 랭부르 마을에서 시작하여 중세 시대에 존재했던 정치적 실체로서, 림부르크 성 건설 후 공국으로 인정받았으나 상속 전쟁, 여러 지배를 거쳐 분할되어 현재 벨기에와 네덜란드 림뷔르흐 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 서프랑크 왕국 -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는 샤를 2세의 아들이자 말더듬이로 불린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귀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며 왕위를 유지하려 했으나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 - 서프랑크 왕국 - 아르눌푸스 레멘시스
아르눌푸스 레멘시스는 랭스 대성당 사제이자 랭스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정치적 격변 속에서 반역을 시도하다 폐위 후 복권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현실에 순응하며 카롤링거 가문의 멸망을 가속화했다.
메르센 조약 | |
---|---|
조약 정보 | |
조약 이름 | 메르센 조약 |
원어 이름 (독일어) | Vertrag von Meerssen |
원어 이름 (프랑스어) | Traité de Meerssen |
관련 사건 | 카롤링거 왕조의 분할 |
![]() | |
참가자 | 루트비히 2세, 샤를 2세 |
장소 | 메르센 |
날짜 | 870년 8월 8일 |
결과 | 중 프랑크 왕국이 루트비히 2세, 샤를 2세, 로도비코 2세에게 분할됨 |
2. 역사적 배경
843년 베르덩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다.[1] 중프랑크 왕국은 855년 Treaty of Prüm|프뤼름 조약영어으로 로타르 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세 아들인 로도비코 2세(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2세), 로타르 2세, 샤를에게 분할되어 각각 이탈리아, 로타린기아, 프로방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863년 샤를이 사망하고 그의 영지는 형제인 로도비코 2세와 로타르 2세에게 분할되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적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1] 샤를 2세가 메스에서 로타린기아 왕으로 즉위했다. 이에 대해 루트비히 2세도 로타린기아의 상속권을 주장했고, 그 결과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는 로타르 2세의 유산(로타린기아) 분할을 결정하는 메르센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으로 로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 왕국만을 소유하게 되었고, 메츠와 아헨을 포함하는 로트링겐 동부[1] 및 상 부르군트 대부분은 동프랑크 왕국에, 로트링겐 서부와 프로방스[1]는 서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로트링겐 서부는 이후 880년 리브몽 조약에서 동프랑크 왕국에 이양되었다.[2]
2. 1. 베르됭 조약 (843년)
카롤링거 제국의 황제 경건왕 루이는 샤를마뉴의 아들로,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다.[1]
로타르 1세 |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고, 중프랑크 왕국을 개인 영토로 받았다. |
독일인 루이(† 876) | 동프랑크 왕국을 받았다(이 나라는 독일 왕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
대머리 샤를(† 877) | 서프랑크 왕국을 받았다(이 나라는 프랑스 왕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아키텐의 피핀 2세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이 영토를 두고 분쟁을 겪었다. |
843년의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다. 그 중 중프랑크 왕국은 855년 로타르 1세의 사망과 함께 세 아들 로도비코 2세 (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2세), 로타르 2세, 샤를에 의해 더 분할되어 각각 이탈리아・로타린기아・프로방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2. 2. 프륌 조약 (855년)
843년 베르덩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다.[1] 855년 프륌 조약으로 로타르 1세가 사망하면서 중프랑크 왕국은 그의 세 아들 로도비코 2세(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2세), 로타르 2세, 샤를(카를)에게 분할되어 각각 이탈리아, 로타링기아, 프로방스를 통치하게 되었다.855년 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중 프랑크 왕국은 프륌 조약에 따라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 이탈리아의 루도비코 2세(† 875): 장남으로, 황제의 왕관과 이탈리아를 상속받았다.
- 프로방스의 샤를(† 863): 프로방스 왕국(로워 부르군디와 프로방스 본토)을 상속받았으며, 이후 루도비코 2세와 로타르 2세에 의해 분할되었다.
- 로타르 2세(† 869): 오스트라시아(베르됭 이후 아버지에 의해 여전히 통제되던 중앙 부분), 프리슬란트 및 어퍼 부르군디를 상속받았으며, 이 왕국은 ''로타리 레그눔''(로트링겐)으로 명명되었다.
동 프랑크와 서 프랑크는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 루트비히 독일인(† 876): 동 프랑크를 통치했다.
- 대머리 샤를(† 877): 서 프랑크를 통치했다.
로타르 2세는 어퍼 부르군디의 남동부 지역을 형제들에게 양도했는데, 프로방스의 샤를은 858년에 벨레이와 무티에 주교령을 받았고, 이탈리아의 루도비코 2세는 이듬해 제네바 주교구, 로잔 주교구, 시옹 로마 가톨릭 교구를 받았다.
2. 3. 로타링기아 분할 문제
843년 베르덩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다.[1] 그 중 중프랑크 왕국은 855년 Treaty of Prüm|프뤼름 조약영어에 따라 로타르 1세가 사망하면서 세 아들 로도비코 2세(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2세), 로타르 2세, 샤를에게 분할되어 각각 이탈리아, 로타린기아, 프로방스를 통치하게 되었다.프로방스 백작 샤를은 간질을 앓았고 863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그의 왕국은 형제들에게 분할되었다. 로타르 2세는 서부 하부 부르군디 지역(리옹 주교구, 비엔, 비바레, 위제스)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서부 상부 부르군디(원래 부르군디 영토의 잔재)와 접해 있었다. 루이 2세는 프로방스 왕국의 나머지 지역을 받았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자[1], 당시 루트비히 2세는 병석에 있었고 로도비코 2세도 이슬람과의 전투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 2세가 같은 해 9월 9일에 메스에서 로타린기아 왕으로 즉위했다. 루트비히 2세도 로타린기아의 상속권을 주장했고, 그 결과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 사이에 로타르 2세의 유산(로타린기아) 분할을 결정한 것이 메르센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로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 왕국만을 소유하게 되었고, 메츠와 아헨을 포함하는 로트링겐 동부[1] 및 상 부르군트 대부분은 동프랑크 왕국에, 로트링겐 서부와 프로방스[1]는 서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로트링겐 서부는 이후 880년 리브몽 조약에서 동프랑크 왕국에 이양되었다.[2]
3. 메르센 조약의 체결과 내용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다.[1] 855년 Treaty of Prüm|프뤼름 조약영어으로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르 1세 사후 세 아들 로도비코 2세(황제 루트비히 2세), 로타르 2세, 샤를에게 분할되어 각각 이탈리아, 로타링기아, 프로방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863년 샤를이 사망하자 그의 영지는 형제인 로도비코 2세와 로타르 2세에게 분할되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면서 동생인 이탈리아 황제 루도비코 2세가 상속자가 되었으나, 바리 에미레이트 원정 중이었던 관계로 삼촌인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가 상속 재산을 차지했다. 샤를은 메츠에서 왕위에 올랐지만, 868년 메츠에서 합의한 대로 로타르 2세의 영토를 분할해야 했다.
870년 메르센 조약은 베르덩 조약을 대체하며, 카롤링거 제국은 론 계곡에서 북해까지 뻗은 중프랑크 왕국 북쪽 절반을 분할하여 사실상 프랑크 왕국의 분열된 영토를 동부와 서부로 재결합했다. 그러나 당시 프리슬란트 해안은 바이킹 지배하에 있어 서류상으로만 분할되었다. 국경선은 뫼즈강, 우르트강, 모젤강, 손강, 론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로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 왕국만을 소유하고, 메츠와 아헨을 포함한 로트링겐 동부 및 상 부르군트 대부분은 동프랑크 왕국에, 로트링겐 서부 및 프로방스는 서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루트비히는 아우스트라시아 대부분과 프리슬란트 대부분, 아헨과 메츠를 차지했다. 남쪽에서는 상부 부르고뉴 대부분을 차지했고, 샤를은 하부 부르고뉴(리옹과 비엔)와 상부 부르고뉴의 작은 서부 지역(포르쉬르손 및 바라(브장송 포함))을 차지하여 이탈리아 진출로를 확보했다. 루트비히는 중앙 아우스트라시아를 아들 젊은 루트비히의 동부 아우스트라시아 부왕국에 합병했고, 로타르 2세의 사생아 알자스의 위그에게 알자스 공국을 주었다.
이 조약으로 현재의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4. 메르센 조약의 결과 및 영향
870년 메르센 조약은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분열되었던 카롤링거 제국의 영토를 재편성한 조약이다. 특히 로타르 2세가 사망한 후 그의 영토였던 로타링기아를 동프랑크 왕국과 서프랑크 왕국이 나누어 가지면서, 프랑크 왕국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삼촌인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는 그의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870년 메르센 조약에 따라, 루트비히 2세는 아헨과 메츠를 포함한 아우스트라시아의 대부분과 프리슬란트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샤를 2세는 리옹과 비엔을 포함한 하부 부르군디와 상부 부르군디의 일부를 차지했다.
이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은 로트링겐 동부를 차지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서프랑크 왕국은 론 강 유역으로 진출하며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을 확보했다. 또한, 로타르 2세의 사생아 알자스의 위그에게는 알자스 공국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 조약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876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2세는 동로트링기아를 공격했지만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880년 리베몽 조약을 통해 로트링기아 전체가 동프랑크 왕국에 합병되면서, 메르센 조약의 결과는 사실상 무효화되었다.
4. 1. 단기적 결과
843년 베르덩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1] 855년 로타르 1세가 사망하면서 Treaty of Prüm|프뤼름 조약영어에 따라 중프랑크 왕국은 로도비코 2세(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2세), 로타르 2세, 샤를(카를)에게 분할되어 각각 이탈리아, 로타린기아, 프로방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863년 샤를이 사망하자 그의 영지는 로도비코 2세와 로타르 2세에게 분할되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자 샤를 2세가 메스에서 로타린기아 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루트비히 2세는 병상에 있었고, 로도비코 2세는 이슬람과의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루트비히 2세도 로타린기아의 상속권을 주장했고, 결국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는 로타르 2세의 유산(로타린기아) 분할을 결정하는 메르센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로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 왕국만을 소유하게 되었고, 메츠와 아헨을 포함한 로트링겐 동부와 상 부르군트 대부분은 동프랑크 왕국에, 로트링겐 서부와 프로방스는 서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880년 리브몽 조약을 통해 로트링겐 서부는 동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갔다.[2] 이로써 현재의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원형이 만들어졌다.4. 2. 장기적 영향
843년 베르덩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다.[1] 이후 중프랑크 왕국은 여러 차례 분할을 거듭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영토인 로타린기아를 분할하기 위해 870년 메르센 조약이 체결되었다.[1]이 조약으로 로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 왕국만을 소유하게 되었고, 메츠 및 아헨을 포함하는 로트링겐 동부[1] 및 상 부르군트의 대부분은 동프랑크 왕국에, 로트링겐 서부 및 프로방스[1]는 서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었다.
로트링겐 서부는 훗날 880년 리브몽 조약을 통해 동프랑크 왕국으로 넘어갔다.[2]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원형이 만들어졌다.[1]
5. 리브몽 조약 (880년)
876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당시 이탈리아 왕이자 황제였던 카를 2세는 동로트링기아를 공격했지만,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루트비히 3세에게 패배했다. 카를 2세가 죽고 그의 후계자들이 서프랑크 왕국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고 애쓰는 동안, 루트비히 3세는 879년에 서부 로트링기아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다. 카를 2세의 손자들은 그에게 로트링기아 전체를 할양해야 했고, 이는 880년 리베몽 조약에 의해 확정되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로트링기아는 최종적으로 동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2]
참조
[1]
Kotobank
ヴェルダン条約
2023-05-16
[2]
Kotobank
リブモン条約
2023-05-16
[3]
문서
[4]
백과사전
메르센 조약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